발행된 페이지
조선


조선(朝鮮)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에 건국하여 1910년 국권을 상실할 때까지 518년간 존속했던 유교적 신분제 왕조 국가이다.

조선
조선(朝鮮)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에 건국하여 1910년 국권을 상실할 때까지 518년간 존속했던 유교적 신분제 왕조 국가이다.
Daniil Ivanov · Public domain · Flag of Korea (1882–1910).svg
조선(朝鮮)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에 건국하여 1910년 국권을 상실할 때까지 518년간 존속했던 유교적 신분제 왕조 국가이다.
1. 한반도의 역사적 왕조
1.1 개요
한반도 역사상 마지막 봉건 왕조이자, 한국 근대 이전의 정체성과 문화적 기틀을 완성한 국가이다. 고려 말기의 혼란을 수습한 신흥 무인 세력 이성계와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가 결합하여 개창하였다. 국호인 '조선'은 한반도 역사상 첫 국가인 단군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아 정했으며, 한양(현재의 서울)을 수도로 삼았다.[1]https://www.museum.go.kr — 이성계는 국호를 정할 때 고조선의 전통을 잇는 '조선'과 자신의 출신지 가문과 연관된 '화령' 두 가지를 명나라에 보내 선택을 요청하였고, 최종적으로 조선이 낙점되었다.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채택하여 국가 전반의 제도와 문화를 유교적 질서에 맞추어 개편하였고,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한 과학, 문화, 역사 기록 분야에서 유례없는 발전을 이루었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제국으로 전환되었으나, 통치 주체의 연속성을 감안하여 일반적으로 조선 왕조의 연장선으로 본다.
1.2 역사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입지를 다진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잡은 뒤 과전법을 시행하여 신진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후 정몽주 등 온건파 사대부를 제거하고 1392년 개경에서 왕위에 올랐다.[2]https://db.history.go.kr — 1392년 7월 이성계는 개경 수창고에서 왕위에 올랐으나, 신하들의 추대로 마지못해 올랐다는 모양새를 취하기 위해 여러 차례 사양하는 연출을 했다. 태종과 세종 대에 이르러 국가의 기틀이 완전히 확립되었으며, 4군 6진 개척을 통해 현재의 한반도 경계를 확정 짓고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등 황금기를 맞이했다. 성종 대에는 국가 통치 규범인 《경국대전》을 완성하며 유교적 법치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선조 대에 이르러 사림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붕당 정치가 시작되었으나, 16세기 말 임진왜란과 17세기 초 정묘·병자호란이라는 미증유의 양란을 겪으며 국토가 황폐해지고 국가 시스템이 큰 타격을 입었다. 조선 후기 광해군, 인조, 효종을 거치며 수습 단계에 들어섰고, 숙종, 영조, 정조 대에는 대동법 실시와 탕평책을 통해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부흥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실학이 대두되고 서민 문화가 발달하는 등 사회 전반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19세기 정조 사후 어린 왕들이 즉위하면서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특정 외척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 시기가 도래하였다. 이로 인해 삼정의 문란이 심화되고 전국적인 농민 봉기가 일어나는 등 국가 기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도 대외적인 이양선의 출몰과 통상 요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적 접근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고종 대에 이르러 강화도 조약을 통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하였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 농민 봉기, 갑오개혁 등 격동의 현대사적 전조를 겪었다. 이후 국운을 반전시키고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일제의 침략 공작과 을사늑약을 거쳐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국권을 상실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3 정치 및 행정
조선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제 국가였으나, 실제로는 국왕의 권력이 사대부 언관 세력 및 의정부의 정승들과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유교적 관료제 성격이 강했다.[3]조선의 왕권은 절대적이지 않았으며, 사헌부와 사간원의 언관들이 국왕의 부당한 명령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봉박(封駁) 제도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중앙 정치 조직은 최고 합의 기관인 의정부와 실무를 담당하는 6조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왕권의 독주를 막고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삼사(사헌부, 사원원, 홍문관)가 활발하게 작동하였다. 특히 왕과 신하가 유교 경전과 역사를 논하는 경연 제도는 조선 정치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 부·목·군·현을 두었으며, 모든 수령은 중앙에서 직접 파견되었다. 수령은 향리를 부리며 행정·사법·군사권을 행사하였으나, 유향소를 중심으로 한 사림 세력의 견제를 받았다. 또한 왕실의 역사와 국가의 주요 사건을 기록하는 시스템이 매우 철저하여,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방대한 양의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을 남겼다.[4]조선왕조실록은 국왕조차 사관 몰래 내용을 열람할 수 없도록 엄격히 통제되었으며, 춘추관 사관이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밀착 감시하며 기록했다.
1.4 사회 및 경제
조선 사회는 양반, 중인, 평민(상민), 천민으로 나뉘는 신분제 사회였다. 사회의 지배층인 양반은 문과와 무과 등 과거 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학문과 정치를 독점하였다. 중인은 기술관, 서리, 서얼 등으로 구성되어 전문직을 담당했고,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민은 농업, 상업, 수공업에 종사하며 조세와 군역의 의무를 졌으며, 천민은 노비가 다수를 차지하여 매매와 상속의 대상이 되었다. 유교적 가족 질서가 정착함에 따라 장자 상속과 가부장제가 강화되었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고려 시대에 비해 크게 하락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농본주의를 근간으로 삼았다. 토지 제도는 전식과에서 과전법, 직전법, 관수관급제로 변화하며 국가의 토지 지배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모내기법(이앙법)이 전국적으로普及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증가하였고, 이는 조선 후기 광작 현상과 상품 작물 재배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에는 대동법의 실시로 관수 품목을 조달하는 공인이 등장하고,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면서 장시와 포구가 활성화되는 등 상업과 화폐 경제가 급격히 발달하였다.
1.5 문화 및 과학기술
성리학을 기본 통치 이념으로 삼았으나, 세종 대를 중심으로 한 조선 초기는 유교적 이념과 실용적 과학기술이 결합하여 독창적인 문화적 르네상스를 이루었다.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백성들의 문자 생활을 혁신적으로 바꾸었으며, 칠정산, 측우기, 자격루, 혼천의 등 독자적인 천문·기상·시계 장치들이 발명되었다.[5]세종 대 창제된 훈민정음은 초기 사대부들로부터 '언문(諺文)'이라 불리며 천대받았으나, 왕실의 교서 전달과 민간의 실용적인 문자 생활에 빠르게 침투했다. 건축 및 미술 분야에서는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 건축과 담백하고 담사한 백자 문화가 발달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현실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실학이 대두하여 학풍의 변화를 가져왔다.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등의 실학자들은 토지 제도 개혁, 수레와 화폐의 유통, 청나라의 선진 기술 수용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유행하였으며, 판소리, 탈춤, 한글 소설 등 서민들이 즐길 수 있는 대중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1.6 평가 및 여운
조선은 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일 왕조를 유지하며 한반도의 독자적인 정체성과 유교적 민족 문화를 완숙시킨 국가이다. 철저한 기록 문화와 법치 시스템, 훈민정음 창제 등 문화적·학술적 업적은 오늘날 한국 문화의 뼈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변화하는 세계 정세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성리학적 명분론과 붕당 정치의 폐단, 당쟁으로 인한 국력 소모, 사회 하층민에 대한 수탈 구조 등 한계를 드러내며 결국 제국主义 열강의 침략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양날의 평가를 받는다.
2. 선박을 건조하는 산업
조선(造船)은 여객이나 화물을 수송하는 선박을 비롯하여 해양 플랜트, 군함 등 물 위에 뜨는 구조물을 설계, 건조, 개조, 수리하는 중공업 분야이다.
2.1 개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산업 중 하나이자 현대 글로벌 물류의 뼈대를 담당하는 거대 제조업이다. 단순히 배를 만드는 것을 넘어 기계, 금속, 전기·전자, 화학 등 현대 공학 기술이 총집합된 종합 중공업의 결정체로 꼽힌다. 바다라는 극도의 악조건을 견뎌내야 하는 특성상 고도의 기술력과 높은 신뢰성이 요구되며, 국가의 물류 경쟁력은 물론 안보와도 직결되는 중대 국가 기반 산업이다.
2.2 특징 및 산업적 특성
조선업은 주문 제작 방식을 취하는 전형적인 수주 산업이다. 선주(선박 발주처)가 원하는 규격과 목적에 맞춰 개별 설계가 이루어지며, 단품 생산 가격이 수천억 원에서 수조 원에 달할 정도로 자본 집중도가 높다.[6]현대 선박 건조는 선주가 계약 체결 후 선금, 중도금, 잔금을 분할 납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조선사의 초기 자금 조달 능력이 건조 승패를 좌우한다. 건조 기간 역시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수년에 걸치기 때문에 경기 변동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특성을 지닌다.
노동 집약적 성격과 기술 집약적 성격을 동시에 가진다. 거대한 선체 블록을 용접하고 조립하는 과정에는 수많은 숙련 노동자의 손길이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는 선형 설계, 친환경 추진 시스템, 자율운항 기술 등 첨단 기술이 가미되어야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에 따라 전후방 산업 연관 효과가 매우 크며, 제철업, 기계공학, 해운업 등과의 공생 관계가 깊다.
2.3 종류 및 주요 생산품
건조되는 선박은 크게 상선, 특수선, 해양 플랜트로 나뉜다. 상선 분야에는 원유나 석유 제품을 운반하는 탱커(Tanker), 곡물이나 광석 등 포장되지 않은 화물을 실어 나르는 벌크선(Bulk Carrier), 정규 노선을 순항하며 컨테이너를 수송하는 컨테이너선(Container Ship)이 포함된다.
최근 고부가가치 선박으로 각광받는 LNG(액화천연가스) 운반선 및 LPG 운반선은 극저온 상태를 유지하는 독보적인 화물창 제조 기술이 요구된다. 이 외에도 잠수함이나 호위함 등의 군함, 연구선, 쇄빙선 등 특정 목적을 수행하는 특수선과 바다 한가운데에서 자원을 시추하고 생산하는 심해 해양 플랜트 역시 조선업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2.4 세계 조선업의 역사와 시장 동향
근대 조선업의 주도권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쥐고 있었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가격 경쟁력과 대규모 설비를 앞세운 일본으로 넘어갔다. 이후 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 걸쳐 압도적인 기술력과 정시 인도 능력을 확보한 대한민국이 세계 시장을 제패하며 조선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7]https://www.motie.go.kr — 대한민국 조선업은 1970년대 현대울산조선소 건조를 시작으로 급성장하여, 2000년대 초반 일본을 제치고 수주량 및 건조량 기준 세계 1위로 올라섰다.
21세기 들어 중국이 정부의 막대한 지원과 저렴한 인건비를 바탕으로 급성장하면서 현재 글로벌 조선 시장은 한국과 중국이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으며, 일본이 그 뒤를 따르는 형태를 띤다. 특히 양적 생산량에서는 중국이 앞서고 있으나, LNG선과 같은 고부가가치·친환경 선박 분야에서는 한국이 여전히 높은 기술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2.5 미래 전망 및 과제
현재 조선업계의 가장 큰 화두는 탈탄소화와 디지털 전환이다. 국제해사기구(IMO)의 환경 규제가 급격히 강화됨에 따라 기존의 벙커C유 대신 LNG, 암모니아, 수소, 메탄올 등을 연료로 사용하는 친환경 선박으로의 전환이 가속화되고 있다.
또한 인공지능과 IoT 기술을 결합한 자율운항 선박의 등장, 스마트 야드 구축을 통한 생산 공정의 자동화가 조선업의 새로운 미래 성장 동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과 숙련공 부족 문제를 첨단 기술로 극복하는 것이 향후 글로벌 조선 시장의 패권을 좌우할 핵심 과제로 평가받는다.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약칭
조선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북부에 위치한 독재 국가이자 미승인국 성격의 미완성 주권 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줄여 부르는 명칭이다.
3.1 개요
동아시아 한반도 북반부에 위치한 국가로,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국제사회에서는 주로 북한(North Korea)으로 불리지만, 해당 정권 스스로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조선이라는 약칭을 주로 사용한다. 남한(대한민국)에서는 휴전선 이북 지역을 점유하고 있는 집단을 가리켜 북한이라 부르는 것이 보편적이나, 북한 내부 및 일부 친북 성향 단체, 그리고 중국이나 일본 등 일부 주변국의 조총련계 사회에서는 이 약칭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3대 세습 독재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8]북한의 3대 세습은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도 극히 이례적인 사례로, 수령의 혈통을 절대화하는 백두혈통 명분론에 기초하고 있다.
3.2 국호 및 약칭의 유래
조선이라는 명칭은 단군조선 및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왕조에서 유래했다. 1948년 한반도 북부에 정권이 들어설 당시 헌법 제정 과정에서 대한민국과의 정통성 경쟁을 염두에 두고 이 역사적 국호를 채택했다. 이에 따라 정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줄여 조선이라 부르며, 자체적인 언론이나 공식 문서에서는 자국을 칭할 때 이 단어를 전적으로 사용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조선이라는 단어가 주로 조선시대(1392~1910)를 가리키는 역사적 용어로 쓰이므로, 이 정권을 가리킬 때는 북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3.3 정치 및 체제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수령이라는 최고 지도자 1인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유일지배체제이자 전제군주정에 가까운 국가다. 조선로동당이 국가의 모든 기관을 통제하며, 당 위에는 수령이라 불리는 지도자가 존재한다. 이들의 통치 이념은 주체사상과 선군정치이며, 최근에는 김정은의 독자적인 사상 체계인 김정은주의가 강조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최고인민회의라는 입법부가 존재하고 선거도 실시되지만, 실제로는 당의 결정을 추인하는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 심각한 인권 침해와 정치범 수용소 운영 등으로 인해 국제사회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고 있다.
3.4 지리 및 경제
한반도의 북반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농경지가 부족하고 기후가 냉량하여 식량 생산에 불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과거 소련을 비롯한 동맹국들의 지원에 의존하던 계획경제 시스템을 유지해 왔으나, 1990년대 대기근(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공식 경제가 사실상 붕괴했다.[9]https://www.unikorea.go.kr — 1990년대 북한의 대기근 시절 중앙 배급제 체제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암시장을 형성한 것이 오늘날 장마당의 효시다. 이후 장마당이라 불리는 비공식적 시장 경제가 활성화되었으나, 정권 차원의 통제와 과도한 군사비 지출, 그리고 핵개발로 인한 국제사회의 강력한 경제 제재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3.5 외교 및 군사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고 있는 국가 중 하나다. 과거 냉전 시기에는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나, 현재는 중국과 러시아가 거의 유일한 외교적·경제적 후원국이다. 정권의 생존을 위해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 집착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벼랑끝 전술을 주요 외교 수단으로 삼는다. 정규군인 조선인민군은 양적으로는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하지만, 장비의 노후화와 경제난으로 인한 물자 부족으로 인해 대칭 전력의 한계를 지니고 있어 핵과 미사일 등 비대칭 전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다.
4. 단군이 건국한 고조선
조선(朝鮮)은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한반도 및 만주 일대에 건국했다고 전해지는 한민족 역사상 최초의 국가이다. 훗날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후대 역사학계에서는 '고조선(古朝鮮)'이라는 명칭으로 주로 부르고 있다.
4.1 개요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성립된 한민족 최초의 계급 사회이자 연맹왕국이다. 단군신화로 대표되는 건국 설화를 보유하고 있으며, 랴오닝 지역과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식 토기 문화권을 공유하는 지배층이 등장하면서 세력을 확장했고, 후기에는 철기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인근의 제후국들을 통합하는 거대 국가로 성장했다. 중국의 여러 문헌에도 자주 언급될 만큼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강대국이었다.
4.2 건국과 사회 구조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신시를 열었던 환웅의 아들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는 농경 사회의 시작, 곰과 호랑이로 대표되는 부족 간의 결합, 그리고 제정일치 사회의 출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고조선 사회는 철저한 계급 사회이자 법치 사회였다. 알려진 사회 규범으로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있으며, 현재는 그중 세 가지 조항만이 전해진다.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 배상하게 하며,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되 죄를 면하려면 거액의 돈을 내게 했다.[10]https://www.nfm.go.kr — 고조선의 범금팔조는 원래 8개 조항이었으나 중국 한서 지리지에 3개 조항만 전해져 내려오며, 남을 상해한 자에게 곡물로 배상하게 한 점으로 미루어 농경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당시에 이미 사유 재산 제도가 확립되어 있었고, 노동력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권력과 계급이 명확히 존재하는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4.3 역사적 변천
고조선의 역사는 크게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단계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의 실존성을 부정하고 주로 단군조선(중국 연나라와 대립하던 시기)과 위만조선의 구분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기원전 4세기 무렵 고조선은 중국의 강대국인 연나라와 대등하게 겨룰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스스로 왕을 칭할 만큼 세력이 커졌으나, 기원전 3세기 초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략을 받아 서쪽 영토 2천 여 리를 상실하고 중심지를 요동에서 평양 일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후 기원전 194년, 중국 진한 교체기의 혼란을 피해 망명해 온 위만이 준왕을 축출하고 왕위를 차지하면서 위만조선이 시작되었다.[11]https://db.history.go.kr — 위만은 고조선으로 망명할 당시 상투를 틀고 오랑캐의 옷을 입고 들어왔으나 준왕의 신임을 얻어 서쪽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가 반란을 일으켰다. 위만은 철기 문화를 적극적으로 보급하고,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한나라와 한반도 남방의 진국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독점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4.4 멸망과 역사적 의의
위만조선의 급격한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한나라 무제는 기원전 109년 대규모 육군과 수군을 동원해 고조선을 침공했다. 고조선은 수성전을 펼치며 1년여 동안 한나라의 대군에 완강히 저항했으나, 장기전에 따른 지배층 내부의 분열과 내통으로 인해 기원전 108년 수도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했다. 한나라는 고조선의 옛 땅에 낙랑, 진번, 임둔, 현도 등 한사군을 설치하여 직접 지배를 시도했다.
그러나 고조선의 유민들은 한사군에 끊임없이 저항했으며, 이는 향후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이 성립하고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 고조선은 단순한 신화 속 국가가 아니라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했던 실존 국가로서, 한민족의 뿌리이자 국가적 정체성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5. 여담
5.1 한양의 조선시대 3대 은밀한 유흥가, '삼청(三淸)'
조선 전기 성리학적 도덕관념이 지배하던 한양에도 도심 한복판에 은밀한 유흥가가 존재했다. 당시 한양에서 가장 번화하고 유흥업이 발달했던 세 지역인 청파(靑坡), 청량리(淸涼里), 청풍계(淸風溪)를 묶어 '삼청(三淸)'이라 불렀다. 도성 안팎의 주요 교통 요충지이자 경치가 뛰어난 곳에 자연스럽게 기생집과 주점이 들어섰으며, 왕족과 사대부 자제는 물론 당대의 문인들이 밤마다 비밀리에 모여 유흥을 즐겼다. 훗날 조선 후기 시정 잡배와 기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야담집에서도 이 삼청 지역은 단골 배경으로 등장한다.
5.2 선조의 일식 공포증과 '구식禮(일식 구제 의식)'
조선 시대에 일식과 월식은 왕의 덕이 부족하여 하늘이 내리는 경고(천변재이)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선조는 일식에 대한 극심한 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식이 예보되면 왕은 흰 옷을 입고 음식을 줄였으며(감선), 궁궐 뜰에 멍석을 깔고 앉아 볕을 피하는 '구식례(救食禮)'를 거행했다. 1598년 정유재란 직후 일식이 발생했을 당시, 선조는 "하늘이 나를 버렸다"며 통곡하고 신하들에게 사직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12]https://sillok.history.go.kr — 선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참화를 겪으며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극심한 컴플렉스를 느꼈고, 하늘의 재앙인 일식을 자신의 불덕 탓으로 돌리며 불안해했다. 이로 인해 관상감(천문 관측 기관)은 일식 예측 시간을 틀릴 경우 관원들이 중형에 처해지는 등 목숨을 걸고 하늘을 관찰해야 했다.
5.3 세종대왕의 육식 사랑과 '고기 없는 수라상' 거부 사건
세종은 뛰어난 학문적 성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록에는 그의 유별난 '고기 사랑'에 대한 기록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육류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하는 성향이 강했으며, 부왕인 태종조차 유언으로 "도가(세종)는 고기가 없으면 밥을 못 먹으니, 내가 죽어도 상중에 고기를 먹게 하라"고 남겼을 정도다. 실제로 태종의 국상 기간 중 세종이 비의도적으로 고기를 끊자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이에 신하들이 상복을 입은 왕에게 강제로 고기 요리를 올리는 웃지 못할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5.4 조선 조정의 '공식 노비 판결문'에 적힌 비속어와 욕설
조선 시대 사노비의 소유권을 두고 벌어지는 소송인 '노비쟁송'은 양반가 사이에서 매우 흔한 일이었다. 성종 대에 작성된 실제 노비 소송 판결 문서(입안)나 사대부들의 편지를 살펴보면, 소송 과정에서相手에 대한 원색적인 비방과 욕설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승소하기 위해 상대방을 "천한 노비의 자식", "아비가 누구인지 모르는 호랑나비" 등으로 비하하는 표현이 조정의 공식 문서에 담겼으며,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관아 앞에서 통곡하거나 난동을 부리는 행위도 흔하게 기록되어 있다.
5.5 조선 후기 한양을 뒤흔든 '안경' 열풍과 예법 논란
17세기 이후 청나라를 통해 안경이 보급되면서 한양의 사대부와 자제들 사이에서 안경은 최첨단 유행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유교적 예법상 자신보다 나이가 많거나 신분이 높은 사람 앞에서 안경을 쓰는 것은 극심한 결례로 간주되었다. 정조는 시력이 매우 나빠 정사를 볼 때 안경을 썼으나, 신하들 앞에서는 안경을 벗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반면 이경교라는 신하는 정조 앞에서 실수로 안경을 쓰고 들어왔다가 정조의 불호령을 듣고 파직당할 뻔했던 해프닝이 실록에 전해진다.[13]https://sillok.history.go.kr — 조선 시대에는 임금이나 스승, 부모 등 어른 앞에서 안경을 쓰는 것이 큰 불경으로 여겨졌으며, 정조 실록에는 안경 착용 문제로 조정에서 소란이 일어난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의 하위 문서
아직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