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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중세는 서양사에서 서로마 제국의 멸망부터 동로마 제국의 멸망 및 대항해 시대의 시작까지, 대략 5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1000년에 달하는 역사적 이행기를 의미한다.

중세
중세는 서양사에서 서로마 제국의 멸망부터 동로마 제국의 멸망 및 대항해 시대의 시작까지, 대략 5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1000년에 달하는 역사적 이행기를 의미한다.
Jules & Jenny from Lincoln, UK · CC BY 2.0 · Canterbury Cathedral, window nXV detail (46220634195).jpg
중세는 서양사에서 서로마 제국의 멸망부터 동로마 제국의 멸망 및 대항해 시대의 시작까지, 대략 5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1000년에 달하는 역사적 이행기를 의미한다.
1. 서양사의 역사적 시기
1.1 개요
고대 유럽 문명이 해체되고 근대 유럽 사회로 이행하는 중간 단계의 시기이다. 과거 르네상스 학자들에 의해 '고대 그리스·로마의 찬란한 문화'와 '자신의 시대' 사이에 끼인 '문화적 암흑기'라는 악평을 들으며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1]르네상스 인문학자 페트라르카가 고전 로마의 찬란함에 비해 당대의 학문과 문화가 퇴보했다고 비판하며 '암흑시대'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했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에서는 단순히 정체된 시기가 아니라 유럽이라는 독자적인 문화권이 형성되고, 근대 사회의 기반이 되는 다양한 제도와 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진 역동적인 시대로 재평가받고 있다. 전통적인 삼분법 구분상 고대와 근대 사이에 위치한다.
1.2 시기 구분
중세의 시작점과 끝점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가 분분하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눈다.
- 중세 초기 (5세기 ~ 10세기):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일어나며 유럽 전역이 혼란에 빠졌던 시기이다. 이슬람 세력이 확장하며 지중해 세계가 분열되었고, 프랑크 왕국이 등장하여 기독교 중심의 서유럽 질서를 잡기 시작했다. 흔히 언급되는 '암흑시대'라는 이미지에 가장 부합하는 때이지만, 동시에 유럽의 독자적 정체성이 싹트던 시기이다.
- 중세 중기 (11세기 ~ 13세기): 중세의 리즈 시절이자 흔히 생각하는 기사, 성, 십자군 전쟁의 시대이다.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인구가 급증하고 도시와 상업이 부활했다. 교황권이 황제권을 압도할 정도로 강력해졌으며, 봉건제와 장원제가 완벽하게 정착했다. 최초의 대학들이 설립되고 고딕 양식의 성당들이 건설되는 등 문화적 번영을 누렸다.
- 중세 후기 (14세기 ~ 15세기): 중세 체제가 흔들리고 종말을 고한 위기의 시대이다. 흑사병의 대유행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고, 기후 변화로 인한 대기근과 백년전쟁 등 끊임없는 전쟁이 이어졌다.[2]https://www.britannica.com/event/Black-Death — 1346년부터 1353년 사이에 유럽 전역을 덮친 흑사병으로 인해 전체 인구의 약 30~60%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봉건제와 장원제가 해체되기 시작했으며, 중앙집권적 정치가 시작되면서 근대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3 정치 및 사회 구조
중세 사회를支支(지탱)하는 핵심적인 두 축은 봉건제와 장원제였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닌, 주군과 신하 사이의 쌍무적 계약 관계에 기반한 봉건제가 주를 이루었다. 왕이나 대영주는 제후들에게 토지(봉토)를 나누어주고 그 대가로 군사적 충성을 얻었다. 이로 인해 왕권은 매우 약했고, 지방 귀족들의 분권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다.
경제적 기반은 장원제였다. 영주가 소유한 장원 안에서 영농에 종사하던 농노들은 자유민과 노예의 중간적 존재로, 토지에 귀속되어 영주에게 부역과 세금을 바쳐야 했다.
그러나 중세 후기로 갈수록 자공업과 상업이 발달하고 흑사병으로 인해 노동력의 가치가 폭등하면서 농노제는 자연스럽게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1.4 종교와 문화
중세 유럽의 정신적 세계는 기독교(가톨릭)가 완전히 지배했다. 교황은 단순한 종교적 지도자를 넘어 국왕의 폐위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정치적 권력을 행사했다. 사람들의 일상생활부터 학문, 예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이 기독교적 세계관 아래 통제되었다.
학문 분야에서는 신학과 철학을 융합하려는 스콜라 철학이 발달했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학자들이 이성을 통해 기독교 교리를 증명하고자 노력했으며, 이는 후대 대학 교육의 모태가 되었다.
건축 분야에서는 창문이 작고 벽이 두꺼운 로마네스크 양식을 거쳐, 높은 첨탑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특징인 고딕 양식으로 발전하며 신을 향한 인간의 열망을 표현했다.
1.5 중세의 종말과 유산
1453년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인쇄술의 발명으로 지식이 대중화되었으며,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중세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3]https://www.britannica.com/event/Fall-of-Constantinople-1453 —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면서 1,000년 넘게 이어진 동로마 제국이 최종 멸망했다. 또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인간 중심의 사고를 다시 지향하는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며 근대로의 전환이 본격화되었다.
중세는 결코 미개하거나 멈춰있던 시대가 아니었다. 현재 서유럽 국가들의 국경선 틀이 이 시기에 잡혔으며, 의회 제도의 씨앗, 대학 시스템, 은행과 신용 제도 등 현대 사회의 수많은 유산들이 중세라는 용광로 속에서 만들어졌다.
2. 국악의 십이율려 중 하나
중세(仲呂)는 동양의 전통 음악 이론인 십이율려(十二律呂) 중 여섯 번째 음률로, 십이율 중 음(陰)에 해당하는 여(呂)에 속하는 전통 음고이다.
2.1 개요
중세(仲呂)는 동양 전통 음악에서 표준이 되는 12가지 음고, 즉 십이율려 가운데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음률이다. 양(陽)의 성질을 가진 율(律)과 음(陰)의 성질을 가진 여(呂)의 구분 중에서 여(呂)에 속하며, 이에 따라 '중려'라고도 불린다. 국악의 율명 체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서양 음악의 12평균율과 비교했을 때 대략 F(파) 음에 해당한다.[4]국악의 기본음인 황종(黃鐘)을 C(도)로 잡을 경우 여섯 번째 음률인 중려(仲呂)는 자연스럽게 F(파) 음과 대응된다. 한자 표기 그대로 풀이하면 '음률의 한가운데' 혹은 '봄의 마지막 달'을 의미하기도 한다.
2.2 음고 및 조율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에 따라 음고를 산출할 때, 중세는 다섯 번째 음률인 임종(林鐘)에서 삼분익일(三分益一, 길이의 1/3을 더함)하여 만들어진다. 십이율려의 기본음인 황종(黃鐘)을 기준으로 했을 때, 국악의 관습적인 음고 체계(아악 기준)에서는 서양음악의 F4 음과 유사한 주파수를 갖는다.
당악이나 향악 등 국악의 조율 방식에 따라 실제 연주되는 음고에는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아악에서는 F음으로 조율되지만, 향악이나 민속악에서는 삼현육각이나 대금의 본청 조율에 따라 E♭ 또는 F#에 가까운 음으로 변용되어 연주되기도 한다. 십이율의 순서상 율관의 길이가 황종보다 짧아 고음역대에 속하는 음률이다.
2.3 명칭의 유래 및 절기적 의미
동양의 전통적인 사상에서 십이율려는 단순한 음악적 음고에 그치지 않고, 12개월의 절기와 자연의 기운(氣)을 대입하여 설명된다. 중세는 음력 4월에 해당하며, 절기상으로는 맹하(孟夏, 초여름)의 기운을 담고 있는 음률이다.
'중(仲)'은 버금 혹은 계절의 중간을 의미하며,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나 양기와 음기가 교차하는 시기의 기운을 음악적으로 상징한다. 옛 문헌에서는 중세의 기운을 만물이 자라나 결실을 준비하는 상태로 풀이하곤 했다.
2.4 표기법 및 악보에서의 쓰임
국악의 전통 악보인 정간보(井簡譜)나 율보(律譜)에서는 한 글자로 줄여 '중(仲)'으로 표기한다.
한 옥타브 위 음은 율명 앞에 삼수변(氵)을 붙여 '淸仲(청중)'으로 표기하고, 두 옥타브 위 음은 삼수변을 두 개 붙여 'clear(쌍청중)'으로 표기한다. 반대로 한 옥타브 아래 음은 사람인변(亻)을 붙여 '倍仲(배중)'으로 나타낸다.
피리, 대금, 해금 등의 관악기와 현악기에서 중세는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는 중심음 중 하나이며, 특히 평조나 계면조의 조적 구성에서 중요한 구성음으로 기능한다.


3. 여담
3.1 고양이의 대량 학살과 흑사병의 상관관계
13세기 교황 칠레스티노 4세 및 칠레스티노 5세 시기를 거쳐 갈리스토 3세에 이르기까지, 가톨릭교회는 고양이를 '악마의 사주를 받는 동물' 혹은 '마녀의 식솔'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도살을 명했다.[5]https://www.vatican.va/content/vatican/en.html — 1233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교서 '교황의 음모(Vox in Rama)'를 통해 검은 고양이를 사탄의 상징으로 규정한 이래 유럽 전역에서 고양이 수난사가 시작되었다. 특히 검은 고양이는 이교도적 주술의 상징으로 여겨져 유럽 전역에서 화형당하거나 절벽에서 떨어뜨려지는 수난을 겪었다. 이러한 인위적인 천적 제거는 쥐의 개체 수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후대 역사학자 및 역학자들은 이 시기의 고양이 학살이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몰살한 흑사병(페스트)의 전파를 가속화한 주요 환경적 요인 중 하나였다고 분석한다.
3.2 맥주 생산자로서의 수녀원과 홉(Hop)의 발견
중세 초기 오염된 생수로 인한 수인성 감염병을 피하기 위해 대중은 발효 과정에서 위생이 확보되는 맥주를 일상적인 음용수로 소비하였다. 당시 맥주 양조의 중심지는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던 가톨릭 수녀원과 대수도원이었다. 특히 12세기 독일의 신비주의자이자 수녀원장이었던 빙겐의 힐데가르트(Hildegard von Bingen)는 자신의 의학 저술을 통해 맥주에 '홉'을 첨가하면 방부 효과가 극대화되고 특유의 쌉쌀한 풍미가 더해진다는 사실을 최초로 기록하였다.[6]힐데가르트 봉 빙겐 수녀는 자신의 의학서 '자연학(Physica)'에서 홉이 맥주의 부패를 막고 유통기한을 늘려준다고 서술했다. 현대 맥주 제조 기술의 핵심인 홉의 도입은 중세 수녀원의 학술적·실용적 연구 성과에 기반을 두고 있다.
3.3 동물의 법적 책임과 사법 재판
중세 유럽의 사법 체계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법적 주체성을 부여하여 엄격한 형사 재판을 진행하였다. 가축이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곡식을 망친 경우, 해당 동물은 정식으로 기소되어 법정에 출두해야 했다. 동물에게도 변호인이 선임되었으며, 증인 심문과 변론 등 인간의 재판과 동일한 절차가 적용되었다. 일례로 1386년 프랑스 팔레즈(Falaise)에서는 아기를 공격해 사망에 이르게 한 돼지가 인간의 옷을 입혀진 채 법정에 서서 유죄 판결을 받고 공개 처형당한 기록이 남아있다.[7]1386년 팔레즈 법정은 아기의 얼굴을 상해해 죽게 한 돼지에게 사람 옷을 입혀 처형하는 판결을 내렸으며, 당시 재판 비용까지 영수증으로 남겨졌다. 심지어 밭을 망친 쥐나 메뚜기 떼 같은 해충에게는 교회법에 따른 퇴마 및 출교(배척) 처분이 내리기도 했다.
3.4 고대 위생 관념의 퇴보와 기독교적 금욕주의
목욕 문화가 발달했던 고대 로마 제국과 달리, 중세 유럽에서는 수세(水洗)에 대한 극심한 기피 현상이 발생했다. 이는 물이 피부의 땀구멍을 열어 흑사병 등 나쁜 기운(미아스마)을 체내로 침투시킨다는 당대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가톨릭 교회는 육체적 청결을 도모하는 행위를 허영심이자 육체적 욕망을 자극하는 죄악으로 보았다.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평생 물을 대지 않고 금욕하는 성직자들이 칭송받았으며, 이로 인해 발생한 악취를 가리기 위해 향수와 스카프, 코르셋 등의 복식 문화가 기형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3.5 국악 십이율려의 '중세(仲呂)'와 서양 중세의 음운론적 동음이의성
동양의 전통 음악 이론인 십이율려(十二律呂)에 등장하는 '중세(仲呂, 혹은 중려)'는 서양사의 '중세(Middle Ages)'와 한글 표기 및 발음이 동일하나 완벽히 무관한 음악학적 개념이다. 십이율려 중 6번째 율에 해당하는 음으로, 서양 음음학의 12평균율과 비교할 때 대략 'E(미)' 음고에 상응한다. 양자는 한자 어휘의 구성(仲: 두 번째/중간 중, 呂: 음률 려)과 서양 역사 구분의 번역어(中世)라는 점에서 완전한 언어학적 우연의 일치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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