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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조선이 근대화를 더 일찍 시작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조선의 조기 근대화 가설은 동아시아 정세와 한반도의 역사적 궤적을 근본적으로 뒤바꿨을 대표적인 역사적 가상 시나리오(Alternative History)이다.

만약 조선이 근대화를 더 일찍 시작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조선의 조기 근대화 가설은 동아시아 정세와 한반도의 역사적 궤적을 근본적으로 뒤바꿨을 대표적인 역사적 가상 시나리오(Alternative History)이다.
Mobius6 · CC BY 4.0 ·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20240409 004.jpg
1. 만약 조선이 근대화를 더 일찍 시작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조선의 조기 근대화 가설은 동아시아 정세와 한반도의 역사적 궤적을 근본적으로 뒤바꿨을 대표적인 역사적 가상 시나리오(Alternative History)이다.
실제 역사에서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오랫동안 성리학적 질서에 안주하며 가톨릭을 비롯한 서구 문물의 수용에 소극적이었고, 결과적으로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속수무강으로 당하며 국권을 피탈당했다.[1]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적극 수용하자는 북학파의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집권층의 명분론에 밀려 국가적 차원의 전면적인 개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정조 대의 실학파 등용이 열매를 맺었거나, 효종 대의 북벌론이 서구 문물 도입을 통한 부국강병책으로 선회했거나, 혹은 흥선대원군 대신 온건개화파가 조기에 정권을 잡았다는 전제하에 조기 근대화가 추진되었다면 역사의 물줄기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1.1 정치 및 사회 구조의 변화
정치적으로는 전제군주정에서 영국의 방식을 모방한 입헌군주제로의 이행이 신속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양반 신분제는 붕괴하고 사농공상의 귀천 관념이 소멸하여 중인과 상민 계층이 대거 관료 및 산업의 주역으로 등용되었을 것이다. 성리학은 유교적 가치관이라는 문화적 유산으로만 남고, 서구의 법치주의와 공공행정 시스템이 빠르게 정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보수적인 유림 세력의 반발로 인한 내전이나 민란 형태의 진통은 피할 수 없었겠지만, 국가 주도의 강력한 개혁이 성공했다면 신속한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로 탈바꿈했을 것이다.
1.2 경제 및 산업 기반의 구축
남한산성이나 강화도 중심의 방어선에 머물지 않고 해양 진출의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다면, 부산, 인천, 원산 등의 항구가 개항장으로서 조기에 활성화되었을 것이다. 경선(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을 잇는 철도망과 전신망이 구축되고, 평안도와 함경도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한 중화학 공업의 기틀이 마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화폐 경제가 신속하게 정착함에 따라 관영 만상이나 송상 같은 전통 상인 세력이 근대적 금융 자본가로 진화하고, 이는 일제강점기라는 파괴적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자본주의의 자발적 발전을 이끌었을 것이다.[2]개성 기반의 송상은 독자적인 사개치부법이라는 사복식 장부 회계 시스템을 창안하여 활용했을 만큼 상업적 자본 축적 기반이 뛰어났다.
1.3 군사력 강화와 외교적 위상
제물포와 원산에 근대적 해군 기지가 건설되고, 서구식 무기와 편제를 도입한 신식 군대가 조기에 양성되었을 것이다. 이는 19세기 말 한반도를 둘러싼 청나라, 러시아, 일본의 세력 균형 속에서 조선이 단순한 '동아시아의 고래 싸움에 끼인 새우'가 아닌, 주체적인 연쇄 균형자(Balancer)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내부 민중 항쟁 역시 외세의 개입 없이 자체적인 정치적 타협이나 개혁을 통해 해결되었을 확률이 높으며,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 침탈에 무기력하게 당하는 일은 막았을 것이다.
1.4 동아시아 정세 및 세계사의 변동
조선의 조기 근대화는 동아시아의 지경학적 구도를 완전히 뒤엎는 결과를 초래한다. 일본의 정한론은 명분을 잃거나 실행 불가능한 야욕에 그쳤을 것이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양상 또한 크게 달라졌거나 아예 일어너지 않았을 수 있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고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면, 20세기 초의 태평양 전쟁이나 한반도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은 일어너지 않았을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다. 나아가 냉전기 동아시아는 한반도를 기점으로 한 삼극 체제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1.5 한계와 현실적인 장벽
다만 이러한 가설에는 명확한 한계점도 존재한다. 청나라의 강력한 간섭과 조공-책봉 관계라는 틀을 조선이 자체적으로 깨부수기란 대단히 힘들었다. 또한, 근대화를 위한 막대한 자본과 기술을 자력으로 조달하기 어려워 결국 서구 열강의 차관에 의존하게 되었을 것이며, 이 과정에서 또 다른 형태의 경제적 종속이나 반식민지화(청나라나 중국의 전철)를 겪었을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권을 유지한 채 이루어진 근대화는 한국사 전반에 걸쳐 문화적 연속성을 보존하고 민족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였음은 분명하다.


2. 여담
2.1 대한제국 육군의 '조직적' 동학 농민 봉기 진압 및 역설적 세력 흡수
조선이 1860년대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 직후 신속하게 근대화를 단행하고 '대한제국군'을 창설했다는 전제하에 자주 등장하는 역사적 가상 시나리오다.[3]https://www.history.go.kr — 1866년 발생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대동강에 침입한 미국 상선을 평양 감영 군민들이 침몰시킨 사건으로, 이후 신미양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곤봉과 화승총을 든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와 일본 제국 육군을 끌어들여 청일전쟁의 빌미를 제공했으나, 일찍 근대화된 조선은 자체 개틀링 기관총 포병대와 개량된 슈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한 정규군을 투입해 봉기를 단기간에 자국 군사력으로 진압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 이후다. 근대적 체제를 갖춘 정부가 농민군의 핵심 요구사항이었던 노비제 폐지, 과부 재가 허용, 토지 개혁 등을 역으로 받아들여 국가 주도의 Top-down 방식으로 신속히 입법화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즉, 봉기 세력의 지도부는 처형하되 그 사상은 체제 흡수하여 국가 근대화의 동력으로 삼는 '역설적 사상 흡수'가 일어났을 것이라는 연구가 많다.
2.2 경성-전주 간 가스등 상업화와 서구 매체의 '아시아의 벨 에포크' 찬사
1870년대 초반에 조일수호조규 대신 평등조약을 체결하고 영국 및 프랑스 자본을 주도적으로 유치했다면, 동아시아 최초의 근대식 가스등 상업화 시범 도시가 도쿄나 상하이가 아닌 '경성(서울)'이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존재한다. 실제 역사에서 한성전기회사의 전등 설치가 다소 늦었던 것에 비해, 조기 근대화 시나리오에서는 경운궁(덕수궁)과 종로 일대에 대규모 가스 램프 망이 깔리게 된다.
당시 조선을 방문한 서구 여행가들의 기행문에는 "동방의 오지였던 은자의 나라가 밤에도 붉은 빛을 발하는 근대화의 정점으로 변모했다"는 식의 찬사가 기록되었을 것이며, 이는 당시 서구 매체에서 대한제국을 '아시아의 벨 에포크(가장 아름다웠던 시절)'로 묘사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2.3 류큐 왕국 망명 정부의 경성 수립과 대일(對日) 견제 거점화
1879년 일본 제국이 류큐 왕국을 강제 병합(류큐 처분)할 당시, 이미 근대식 함대와 외교망을 갖춘 조선이 존재했다면 류큐의 쇼 타이 국왕이나 왕족들이 대만이나 청나라 대신 경성으로 망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4]류큐 왕국은 조선 및 청나라와 활발한 조공 무역을 이어가던 독립국이었으나 1879년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어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되었다.
조선 정부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경성 내에 '류큐 왕국 망명 정부' 수립을 승인하고, 남해안의 군함들을 제주도 및 요나구니섬 근해에 전진 배치하여 일본의 태평양 진출을 견제하는 거점으로 삼았을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 외교사에서 조선이 단순한 침략 대상이 아닌, 동아시아 해양 질서의 팍스 아시아나(Pax Asiana)를 주도하는 핵심 플레이어로 부상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가상 시나리오로 언급된다.
2.4 '조선식 기모노'라 불린 하이브리드 개화기 복식의 세계적 유행
조선이 조기 근대화에 성공했다면 의복의 형태 역시 서구식 양복과 전통 한복이 기묘하게 결합된 독자적인 '개화기 하이브리드 복식'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전통 복식이 억압받거나 단발령 등으로 급격히 해체되었으나, 주도적 근대화 시나리오에서는 갓을 현대적으로 개량한 근대식 펠트모자(Hat)와 한복 저고리의 깃을 살린 슈트가 융합된 복식이 통용되었을 것으로 본다.
특히 19세기 말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대한제국 사절단의 '상모와 갓을 결합한 연회복'이나 '비단 두루마기형 코트'는 서구 상류층 사이에서 큰 파장을 일으키며, 이른바 '자포니즘'과 대등한 수준의 '코레아니즘(Coréanisme)' 열풍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라는 문화사적 추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