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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 사람들은 실제로 얼마나 더러웠을까?


중세 유럽인들이 평생 씻지 않아 악취와 이로 가득했다는 통념은 후대의 편견과 오해에서 비롯된 대표적인 역사적 오류이다.

중세 유럽 사람들은 실제로 얼마나 더러웠을까?
중세 유럽인들이 평생 씻지 않아 악취와 이로 가득했다는 통념은 후대의 편견과 오해에서 비롯된 대표적인 역사적 오류이다.
Ellis, Havelock, 1859-1939 · Public domain · The task of social hygiene (IA cu31924021466119).pdf
1. 중세 유럽 사람들은 실제로 얼마나 더러웠을까?
중세 유럽인들이 평생 씻지 않아 악취와 이로 가득했다는 통념은 후대의 편견과 오해에서 비롯된 대표적인 역사적 오류이다.
대중매체나 통념 속 중세 유럽은 오물이 거리에 넘쳐나고, 사람들이 평생 물을 멀리하며 살아간 '어둠과 불결의 시대'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과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중세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과 기준을 가지고 위생 상태를 유지하려 노력했으며, 불결함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이미지의 상당수는 후대인 근세나 근대에 재구성된 것이다.
1.1 위생 관념과 목욕 문화
중세 초기와 고전 중세 사람들은 생각보다 목욕을 즐겼다. 로마 제국의 목욕 문화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유럽 전역의 도시에는 공중목욕탕이 활발하게 운영되었다.[1]https://www.metmuseum.org/toah/hd/bath/hd_bath.htm — 중세 도시의 공중목욕탕은 단순히 씻는 곳이 아니라 식사와 증기탕, 마사지를 함께 즐기는 휴양지에 가까웠다. 남녀가 함께 이용하는 경우도 흔했기에 교회로부터 성적 몰락의 온상이라는 비판을 자주 받았다. 이 공중목욕탕은 단순히 몸을 씻는 장소를 넘어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사회적 교류의 장이었다.
물론 현대와 같은 수돗물이나 비누가 대중화된 것은 아니었기에 잿물이나 향묵, 식물 추출물을 사용해 씻어야 했다. 상류층은 따뜻한 물을 채운 목욕통에 향유나 장미 꽃잎을 넣어 목욕을 즐겼고, 대중적인 공중목욕탕을 이용할 경제적 여유가 없는 서민들도 인근의 강이나 시냇가에서 몸을 씻었다. 특히 식사 전후로 손을 씻는 것은 중세 에티켓의 기본 중의 기본으로 여겨졌다.
1.2 물을 두려워하게 된 진짜 이유
그렇다면 어쩌다 중세인이 씻지 않았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을까. 역설적이게도 씻지 않는 문화가 정착된 것은 중세가 끝나가는 14세기 중반부터였다. 흑사병이 유럽을 덮치면서 당시 의학자들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면 모공이 열려 병의 기운이 몸속으로 침투한다고 믿기 시작했다.
이러한 '모공 이론'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르네상스 시대로 넘어가는 15세기 이후부터 17세기까지 유럽인들은 물로 몸을 씻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게 되었다. 즉,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평생 안 씻는 유럽인'의 모습은 중세가 아니라 오랑주 공작이나 루이 14세가 살던 근세 초기의 모습에 훨씬 가깝다.[2]태양왕 루이 14세는 평생 목욕을 손에 꼽을 정도로만 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대 의사들이 물을 병균의 통로로 여겼기 때문에 왕조차 물에 들어가는 것을 피하고 천으로 몸을 닦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 시기에는 물 대신 깨끗한 linen 셔츠를 자주 갈아입거나 향수를 뿌리는 것으로 위생을 대체했다.
1.3 도시 환경과 분뇨 처리
도시의 위생 상태는 농촌에 비해 확연히 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인구는 늘어났으나 배수 시설과 하수도 시스템은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로 인해 요강에 모아둔 인분을 창밖으로 던지는 행위가횡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방치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중세 도시에서는 밤중에 오물을 버리는 것을 금지하거나 특정 시간에만 버리도록 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또한 청소부를 고용해 거리를 정비하고 오물을 치우는 시스템이 존재했다. 왕이나 귀족이 방문할 때면 거리를 청소하고 향기로운 풀을 깔아 악취를 가리기도 했다. 현대의 관점에서는 비위생적이고 미흡해 보이지만, 당시 기술 한계 내에서는 나름대로 도시 위생을 관리하려는 행정적 노력이 지속되었다.
1.4 의복과 구강 관리
중세인들은 겉옷을 자주 씻지는 못했으나 속옷 관리에 공을 들였다. 피부에 직접 닿는 속옷은 주로 삼베나 리넨으로 만들어졌으며, 이를 자주 삶아 파리와 이 같은 기생충을 제거하려 했다. 겉옷 역시 털어내거나 말려 부러시로 흙을 털어내는 방식으로 관리했다.
구강 위생 역시 의외로 관리가 이루어졌다. 나뭇가지 끝을 짓이겨 칫솔처럼 사용하거나, 로즈마리나 헤이즐넛 나뭇가지로 이와 잇몸을 문질러 닦았다. 또한 와인이나 식초에 와인을 섞은 물로 입안을 헹구어 악취를 제거하려 했다. 중세인들의 치아 상태가 의외로 현대인보다 양호한 경우도 많았는데, 이는 당시 설탕이 매우 귀한 고급 사치품이었기에 설탕 섭취량이 적어 충치 발생률이 낮았기 때문이다.[3]https://www.nature.com/articles/sj.bdj.2017.1001 — 실제로 중세 인골의 치아 상태를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정제된 설탕을 대량 소비하기 시작한 근대나 현대인에 비해 충치 발생 비율이 훨씬 낮게 나타났다.
1.5 문화적 통념의 오해
결론적으로 중세 유럽인들이 modern 수준의 위생 개념을 가졌던 것은 아니지만, 미개하고 더럽게 살았다는 것은 후대 르네상스 시대와 근대 계몽주의 시대가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앞선 시대를 폄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억측이다.
중세인들은 종교적, 의학적, 사회적 기준에 따라 스스로를 깨끗하게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들의 위생 기준을 현대의 기준에 비추어 단정적으로 '더럽다'고 평가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오류라 할 수 있다.


2. 여담
2.1 목욕 문화의 쇠퇴와 의학적 오해
중세 초·중기까지만 해도 로마 제국의 영향으로 대중목욕탕 문화가 잔존해 있었으나, 14세기 흑사병의 대유행 이후 목욕에 대한 인식이 긍정에서 공포로 급변하였다. 당시 의학자들은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면 모공이 열려 ‘악성 기운(미아스마)’과 흑사병 균이 체내로 침투한다고 믿었다. 이로 인해 세탁과 목욕을 기피하고 젖은 옷을 피하는 문화가 정착되었으며, 역설적으로 신체 청결을 도모하던 행위가 질병의 원인으로 지목받는 시대가 열렸다.
2.2 '건식 세탁'과 린넨 속옷의 신화
물로 씻는 행위가 위험시되면서 중세 후기 및 근세 사람들은 겉을 씻는 대신 린넨(아마포) 속옷을 자주 바꿔 입는 ‘건식 세탁’ 방식을 채택하였다. 당대인들은 흰색 린넨 속옷이 피부의 땀과 노폐물을 흡수하는 정화 작용을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신체의 청결도는 겉으로 드러나는 린넨 깃과 소매의 하얀 정도에 따라 평가되었으며, 이는 씻지 않은 몸을 비단과 레이스로 감싸고 속옷만 교체하는 기묘한 위생 관념으로 이어졌다.
2.3 가발 및 악세서리와 이(Lice) 번식의 상관관계
목욕을 기피함에 따라 두피와 몸에 이, 벼룩 등 기생충이 번식하는 것은 일상적인 현상이었다. 머리를 씻지 않아 발생하는 악취와 짓무름을 감추기 위해 삭발 후 가발을 쓰는 문화가 발달했으나, 이 가발 역시 기생충의 온상이 되었다. 당대 귀족들은 가발 속에 꼬이는 이를 잡기 위해 피로 물든 가발을 털어내거나, 벼룩을 유인하기 위해 피와 꿀을 묻힌 부적 형태의 ‘벼룩 캡처(Flea trap)’를 목걸이처럼 착용하고 다니기도 했다.[4]당시 사용된 벼룩 트랩은 쥐라기 상아나 금속으로 화려하게 제작되어 귀족들의 장신구 역할을 겸했다. 내부에는 피 피아노나 진득한 끈적이를 넣어 벼룩을 유인했다.
2.4 향수 및 코르사주 문화의 역설적 발달
체취와 분뇨 냄새가 섞인 도시의 악취를 가리기 위해 향수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악취가 질병을 유발한다는 관념 때문에, 냄새를 냄새로 막기 위한 강렬한 동물성 향(무스크, 영묘향 등)이 선호되었다. 귀족들은 향료를 넣은 금속 구체인 '포만더(Pomander)'를 들고 다니며 코에 대고 숨을 쉬었으며, 여성들은 악취를 가리기 위해 가슴에 생화를 꽂는 코르사주를 착용했으나 이 역시 위생 개선이 아닌 악취 덮기에 불과했다.
2.5 요강 문화와 길거리 오물 투척
중세 및 근세 유럽의 도시에는 현대적 의미의 하수도 시설이 거의 전무했다. 주민들은 집 안에서 요강(Chamber pot)에 볼일을 본 후, 창문 밖으로 "물 조심해라!(Gardez l'eau!)"라고 외친 뒤 길거리에 그냥 내던지는 것이 관례였다.[5]프랑스어 경고 문구인 'Gardez l'eau(물 조심해라)'는 영국으로 건너가 찌꺼기나 오물을 뜻하는 단어 'Loo'(화장실을 뜻하는 영국식 표현)의 유래가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로 인해 도로 중앙에는 오물이 흐르는 수로가 형성되었고, 걸어 다니는 보행자들은 건물 벽면에 바짝 붙어 걸어야 했다. 굽이 높은 힐(하이힐)이나 햇빛 차단용이 아닌 '오물 방지용' 챙이 넓은 모자가 발달한 것도 이 때문이다.